独立直後の北朝鮮における「識字運動」に関する一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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概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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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稿は、1946年11月から1949年初にかけて行われた北朝鮮の「識字運動」について検討したものである。識字運動は「社会的・政治的」運動の一形態であるが、それは北朝鮮においても同じであった。即ち、北朝鮮では全国家的な次元で識字運動に取り組んだのである。これは識字運動が「建国思想総動員運動」の一環として進められたことからもすぐ理解できるだろう。「建国思想総動員運動」が起こると、当時政府の役割をしていた「北朝鮮(臨時)人民委員会」は識字運動に必要なあらゆる物資や技術の援助は勿論のこと、講師や教科書の問題まで、すべてを保証してくれた。これは文字を知らない人々にハングルの読み書きや加減乗除を教えることにより、かれらを「反帝反封建革命」に参加させるためであった。その結果、1949年の初め頃には230万名に至っていた非識字者の殆んどがハングルの読み書き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識字運動が終わってから、人民たちは「労働新聞」をはじめ、金日成選集やマルクス-レーニン主義文献を学ぶことに留まらず、国家の政策についても勉強し、それに理解を示すようになった。言語政策の面においても識字運動の影響は大きかった。識字の成果を確固たるものにするため、まず漢字が廃止され、それはまた「言語浄化」および規範の整備にまで繋がったのである。結局、北朝鮮の識字運動は見事に成功を収めたと言えるだろう。이 글은 1946년 11월부터 1949년 초에 걸쳐 북한에서 일어났던 `문맹퇴치운동'을 검토한 것이다. 문맹퇴치는 사회적‧정치적 운동의 하나라는 것이 우리의 출발점이었다. 북한에서의 `문맹퇴치운동'은, 초창기에는 자발적인 것이었으나, 1946년 11월 무렵부터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의 일환이 되면서, 국가적인 차원의 운동으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당시 정부의 역할을 하고 있던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문맹퇴치에 필요한 모든 물질적‧기술적 원조는 물론, 강사 문제의 해결에까지 적극 나서게 된다. 이것은 물론, 문맹자들에게 읽고 쓰기를 가르침으로써, 그들을 `반제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에 적극 동참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1949년 초 무렵에는, 230만에 이르던 문맹자들이 거의 퇴치되어 한글을 읽고 쓰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문맹퇴치의 결과, 인민들은 『로동 신문』을 비롯한 신문‧잡지를 구독하는 것은 물론, 김일성 선집이나 맑스-레닌주의 문헌까지도 학습함으로써 국가의 정책을 습득하고 이해하려는 자세를 보이게 된다. 언어정책적인 측면에서도 문맹퇴치의 영향은 지대했다. 문맹퇴치의 성과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우선 한자가 폐지되었고, 그것은 `언어정화' 및 60년대의 `어휘정리'로 이어졌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러한 제반 언어정책들은 규범의 정비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문풍 개선 사업'을 통하여 출판물의 대중화에도 이어졌다. 결국 북한의 `문맹퇴치운동'은 보기 좋게 성공한 셈이다.